행복한자녀양육 <김계현칼럼> 행복감의 정체

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언제부턴가 우리는 “아무개 엄마”라고 불리지 않고 “아무개 씨”로,
즉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것이 개인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이제부터는 여성도 “누구누구의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관계의 맥락이 아닌, 한명의 자아(自我, self)로서 존재하고
인정된다는 자기 정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지난회의 글에서, 자녀의 무엇으로부터 내 감정의 원인을 찾으려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잘 들여다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바 있다.
오늘의 글은 그 후속 편으로서 자기를 어떻게 들여다 보고,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자기 자신, 즉 자아를 찾는 첫 번째 순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오늘은 자아를 찾는 질문을 통해서 짧은 여행을 해보자.

첫째,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것인가?
1960년대에 미국의 경영학자들은 심리학을 경영학에 접목시키곤 했다. 그 때 유행했던 이론 중에서 직무 즉 업무에 대한 만족,
회사에 대한 만족, 복지에 대한 만족, 동료나 상사에 대한 만족 등 사원들의 만족감 이론이 있었는데 그 당시 발견한 중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만족과 불만족(“불만”이 더 정확한 단어임)이 같은 한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불만이 적으면 자동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족이 적다고 해서 자동으로 불만을 느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뇌에는 행복이나 만족을 느끼는 회로와 불행이나 불만을 느끼는 회로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신경생리학 연구결과들은
50년 전의 심리학(혹은 경영심리학, 조직심리학) 이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이 행복이나 불행을 느낌에 있어서 어느 유형의 사람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편의상 이분법, 흑백논리를 사용하자. 당신은 특별히 불행을 느낄만한 사건들이 별로 없으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인가?
아니면, 특별히 행복을 느낄만한 사건들이 별로 없으면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인가?
여기서 당신이 어느 유형의 인간인지는 생리적으로,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의식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행복-불행 유형을 선택 하시겠습니까?

둘째, 행복하면 잘사는 것인가, 잘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인생을 뜻하는가? 유명한 영화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황정민의 대사 중에서
“아부지, 나 이 정도면 잘 살었지예.....”라는 말이 나온다. 필자도 그 장면에서 가슴 찡한 공감을 많이 느끼고 눈물도 흘렸다.
삶의 만족도 조사들에 의하면, 경제적으로 “잘살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들이 종종 높은 만족도, 높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노르웨이나 핀란드와 같이 경제적으로 잘살면서 동시에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이 높은 나라 국민들도 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 중에 삶의 만족감과 행복감이 아주 낮게 나오는 결과를 볼 수가 있다.
일본이 가장 대표적이고 우리나라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본다.
다시 한번 흑백논리를 사용해 보자. 당신은 어느 쪽 유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까?
“행복하면 잘사는 것이다”와 “잘살아야 행복한 것이다” 중에서. 물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상태는 행복과 잘사는 것이
동시에 공존하는 상태이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처럼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잘살면서 국민들의 행복감도 높은 그런 상태를
이상적으로 여긴다. 누구나 그것을 원한다. 하지만, 과연 나의 현재 상황이 그런 조건을 주고 있는가?
선택과 우선순위를 강요받는다면, 당신은 행복과 잘사는 것 중에서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오늘의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당신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필자는 이것을 깨달았다. 행복감은 불행감과는 별도의 것이다.
그리고 행복감은 잘사는 것과 별도로 경험된다. 다시 말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은 불행감이나 잘사는 것(경제적 물질적 조건)과는
독립적으로 경험되고 느껴지는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반복해서 말하면, 불행하거나 못살면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에 관심을 집중하면 행복감을 느낄 수가 (“접할 수가”가 더 정확한 표현일 듯) 없다. 잘살고 못사는 것에 관심을 집중해도
역시 행복감을 느낄 수가(접할 수가) 없다. 음식 맛을 더 민감하게 잘 느끼는 사람이 있듯이 행복감도 더 민감하게 잘 느끼는
감각의 개인차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약력]
김계현 교수,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육상담, 상담심리학, 교육심리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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