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김성종님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Lawrence Peter Berra 1925~]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성종이라고 하며 간단히 제 소개와 함께 제 삶을 적어볼까 합니다. 열흘 전 삼성병원에 외래를 갔을 때 채혈을 하고 CT를 찍다가 우연히 벽에 붙은 삼성서울병원 감동스토리 공모주제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두서 없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저는 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부산에서 자라면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죠. 가족력이나 유전적으로 큰 병이 없던 저로서는 육체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잘 자랐습니다. 암이라는 뜻밖의 병마와 삼성서울병원이라는 인연은 제 나이 서른 후반에 찾아왔습니다.

나이는 2013년 올해 정확히 마흔입니다. 제가 92학번이라 일명 IMF학번이라고 불립니다. 졸업과 동시에 모든 일자리가 없어져서 대부분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죠.  전 부산에서 자랐으며 학교는 서울에서 나왔고, 군대를 다녀와서 취직을 한 전형적인 사례인데 운이 좋아 바로 취업을 했습니다. 200:1의 경쟁률을 뚫고 S대기업에 합격한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었죠. 지방에서 올라온 터라 그야말로 누구에게 의지할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여기저기 헛돈 쓰지 않고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했습니다. 2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보낸 시간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아내는 서울여자고 소개로 만났습니다. 결혼은 2007년도에 했으니 이제 5년 차네요. 기숙사와 단칸방에 익숙했던 저에게 파주에 첫 신혼 전세 아파트 집을 계약했을 때의 기쁨은 저에게 작은 행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혼이 정말 짧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기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 자주 검사를 받으러 가던 중 2009년 5월 복부에 테니스 공만한 혹 같은 게 잡혔습니다. 처음엔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뭉친 것으로 생각했으나 한 달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아 이상하게 여겨 동네 내과에 가서 복부초음파를 받았지요. 의사가 검사를 하면서 눈이 점점 커지더니 목까지 다 올려보라고 했습니다. 전 영문을 몰라 같이 눈이 휘둥그래졌고, 의사는 연신 젤을 발라가며 제 상체 이곳 저곳 자세히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좀 이상하다며 제게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하길 권하더군요.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니 간에 좌측과 우측 모두 종양 같은 것이 보인다며 최대한 빨리 가서 조직검사를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는 집에서 가깝고 최대한 빨리 예약을 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철렁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몇 일 지나서 바로 국립 암 센터에서 검사를 받고 기다리는 일주일은 참으로 초조와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무슨 일이 잘못된 것 같은 직감은 했지만 그렇게 나쁜 결과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검사결과는 제 예상보다 더 안 좋았습니다. 병명도 생소한 신경내분비 암 4기로 간으로 전이된 종양은 좌측에 6cm, 우측에 4cm나 있었고, 대장과 소장, 복강에도 암세포가 이미 퍼져있었죠.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처럼 시원하게 울었습니다. 혼자 운전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가도가도 집이 나오질 않더군요. 아내와 부모님께 일반 종양이 아닌 악성으로 판명이 났고 적절한 절차에 따라 수술이 진행될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은 감기몸살 한번 걸리지 않던 아들이 암 판정을 받자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아내는 망연자실했었죠. 혹시나 싶어 다른 대형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다시 받아봤지만 똑 같은 판정이 나왔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적극적으로 치료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처가부모님의 얼굴을 보면서였습니다. 영화 25시를 보셨는지요? 인생의 회한이 담긴 미소를 짓는 안소니 퀸의 마지막 장면처럼 장인 장모님의 얼굴은 걱정 반 우려 반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남의 귀한 젊은 딸을 데려다가 청상과부를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 하나로 꼭 건강하게 일어나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외과 팀은 수술이 좀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다가 난상 토론 끝에 어렵게 수술이 결정 났죠. 수술날짜가 잡히자 굳건했던 마음도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주변에 수술조차 받지 못하고 퇴원하는 사람들을 본 것도 있었지만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한 수술진의 애매한 태도도 저에게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수술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그리 높지 않음을 들은 저는 수술하기 전에 혹시 모를 남은 인생을 준비했습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조용히 제 상황을 알렸고, 수술 받기 며칠 친구 변호사를 찾아가 담담히 유서를 쓰고 공증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죽기 전에 한다는데 직접 해보니 실감이 나지 않더군요. 회사에서 워드로 작성한 것이 익숙한 저에게 자필로 적어야 법적 효력이 있다면서 자필로 적어가는 제 손은 일기를 적은 건지 유서를 적은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수술 하루 전에 이것저것 검사를 하고 몸 속을 깨끗이 비워야 된다며 관장을 하고 완전히 탈진이 된 상태에서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는 제 자신을 보고 그 동안 참 한심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로 다닐 때 회사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TOEIC 공부하고, 승진시험 걱정하고, 눈도장 받으려고 회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술자리 지키면서 죽도록 일만한 걸 생각하니 솔직히 많이 억울하더군요. 게다가 나이 사십도 안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괴로울 따름이었습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과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일어나면서 어느덧 제 수술날짜는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이 되고 수술실 들어가기 1시간 전 가족들과 면회를 했습니다. 막상 수술실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생각보다 담담하더군요. 울고 있는 아내와 장모님에게 애써 괜찮다는 위로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전 10시간 가까이 되는 대수술을 받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후에도 피를 워낙 많이 쏟아 3일을 더 있어야 했습니다. 고통은 그게 시작도 아니었죠. 수술은 잘되었지만 모든 암세포를 다 제거할 순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입원해있는 석 달 동안 물질적, 정신적 고통이 하루에 몇 번이고 지나갔지만 표시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뒤로하고 올라오신 부모님의 간호와 하던 일을 퇴직하고 간호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혼자 아프다고 푸념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어떡하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전 수술후유증이 큰 편이었습니다. 장기를 많이 잘라내어 몸 속에 피가 많이 고였고, 그래서 잦은 고열 때문에 응급상황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열이 오르니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병원에 있으면서 제 몸무게가 20kg 가까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더 가혹한 과정이 퇴원 후에 절 기다리고 있었죠. 공포의 항암이었습니다. 전 보험을 들지 않아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여서 물질적으로 상당히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의사가 있었으니 김홍관 흉부외과 교수였습니다. 김교수는 저와 어릴 적 친구였습니다. 내가 아는 그는 겸손하고 올곧은 의사였습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 교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죠. 그래서 다른 의사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삼성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김교수는 친절하게 외래 때 저와 함께 참석하여 혈액종양내과 이지연 교수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실력 있고 불친절한 의사보다 실력은 떨어지나 친절한 의사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지연 교수는 실력만큼 늘 친절했고 저는 외래를 볼 때마다 상당히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의 항암이 시작되었습니다. 항암으로 제가 나을 수만 있다면 10번이고 20번이고 받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너무나 힘들더군요. 머리는 다 빠지고 몸무게는 또다시 줄어갔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731부대의 마루타가 생각났습니다. 탈북자들이 TV에 나와 먹지 못해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으로 온 그 괴로움마저 저에게는 비할 바가 못되었습니다.

제 병은 애플 창업자 Steve Jobs와 같은 병입니다. 난치 희귀 병이라 고칠 수 있는 뚜렷한 약이 없죠. 그래서 보편적인 화학항암제인 시스플라틴[Cisplatin]과 에토포사이드[Etoposide]를 7사이클을 시행했습니다. 전 항암 들어가기 전에 애플 사에 전자메일을 보냈습니다.

“당신 회사 창업자가 앓고 있는 병과 거의 같은 병의 사람이 한국에 살고 있고, 수술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치료를 받고 있지만 열심히 살아서 나중에 꼭 만나서 밥 한번 먹자. 밥은 내가 사겠다”라고요.

답장은 기대 안 했는데 비서가 대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용감하게도 자기에게 e-mail을 보내 밥을 사겠다고 한 것에 굉장한 호감이 생겼으니 열심히 살아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봐서 자신이 미국에 한번 초대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대답이 립서비스 차원이라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다시 열심히 치료받기 시작했고 2011년 가을 저는 항암과 악전고투 중이었습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피 말리는 고통을 혼자서 처절하게 감내하고 있던 중이었죠. 삼성 암 센터 안에서 링거를 꽂고 안도의 한숨보다는 육신의 허물을 벗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TV 뉴스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나운서가 Jobs의 사망소식이 알렸습니다. 저는 일어나서 그의 사망소식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누구보다 그의 복귀를 반기고 싶었던 저로써는 큰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허무함에 빠졌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더 힘이 없더군요. 저는 빛이 잘 드는 쪽으로 침대방향을 틀고 눈을 감은 후 잠시 그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가 아마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갔을 거라 애써 자위했습니다. 누구보다 살고 싶어했을 텐데 말이죠.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간호사가 다가와서 채혈을 하기 위해 고무튜브로 제 팔뚝을 톡톡 쳤습니다. 그날 오후 피검사가 나왔고 백혈구 수치가 괜찮다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저의 항암치료는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2012. 10월이 되었고, 어느덧 제가 암을 병을 진단받은 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수술도 받았고 항암도 받고 있지만 전 간과 폐에 전이가 된 상태입니다. 몸무게는 더 빠지고 항암에 지쳐가고 있었죠. 하지만 제 마음은 의외로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 동안 저를 괴롭혀왔던 상실감에서도 많이 벗어났고, 어느덧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히 받아드리고 있는 거 같기 때문이죠. 부모님과 아내도 이런 저의 모습에 불안했던 내색이 많이 줄었습니다. 아마도 마음을 많이 비워서 그리 된 것 같습니다.

작년에 친구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길래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더니 정말 사연을 보내서 당첨이 되어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연예인만 하는 줄 알았는데 거의 기적이었죠. 평일인데도 처음엔 잘 몰랐는데 시합이 시작되면서 2만 명이 가까이 들어와 추운 날씨에도 추운 줄도 모르고 마운드에 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마도 결혼식장에 제 이름이 호명되어 입장했던 것만큼 떨리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병과 이름이 호명되자 잠시 야구장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시구를 한 뒤, 곧이어 끝내기 홈런을 치고 난 뒤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양쪽 벤치에서 예쁜 여자 연예인이 나오길 기대했다가 시무룩해 하던 선수들도 고함을 지르며 소리질러 주던 그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저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병마를 이겨내기 위해 다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1년이 흘러 어느덧 2013년이 되었습니다. 보험사에서도, 병원에서도 늘 생존율을 이야기할 때 5년 차를 거론합니다. 그렇기에 2013년 한 해는 저에게 의미심장이 남다른 해입니다. 마지막 4년 차이기 때문이죠.  제 몸에 맞는 항암약도 없고, 나아질 기미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저는 누구보다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조영제 부작용 삼성서울병원에 실려갔다가 간호사들로부터 도움 받은 일을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유난히 조영제 부작용이 심했던 저는 올해 처음으로 찍은 PET CT에서 간에 이상증세가 보이는 거 같다며 좀더 선명한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고 할 수없이 조영제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부작용 방지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렸죠. 그때 참으로 간호사분들께서 응급조치를 잘해주셨습니다. 얼굴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증세가 왔으나 안정시켜주고 계속 대화를 해준 덕분에 무사히 응급조치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거든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이제 무더위가 올 것 같은 5월이 찾아왔습니다. 현재 저는 항암을 수텐으로 바꿔서 시행하고 있고, 옥트레이타이드 주사를 같이 맞고 있습니다. 주사를 맞기 위해 암 센터 주사실에 들릴 때 간호사가 항암이 잘 듣고 있는 환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약이 잘 듣고 있으니 살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거죠. 전 언제 저런 날이 올까 생각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돌아옵니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죠.

늘 삶이 초연해지도록 마음을 잡아 봅니다. Job도 떠나고 제 항암도 기약이 없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습니다.

스티브 맥퀸이 열연한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에 탈출을 한 후 망망대해를 떠가면서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 이 자식들아, 나는 살아있다!"
 
퀴퀴한 알코올 솜 냄새가 싫으면서도 어쩌면 나 자신이 살고 있다는 스스로의 절박함을 일깨워주는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살아있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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