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6-18 이슈리포트] 20대의 정신건강 '식사하셨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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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6-12-28 |
내용
20대의 정신건강 '식사하셨어요'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효철 임상강사
“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잠시 동안 그는 이기적이고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음식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활동이라 할 수 있다.” (TV Tokyo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중)
누군가를 만나면 으레 “식사하셨어요?”라고 인사하곤 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정말 밥을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는 마음에 주고받던 애련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유행이 돌고 돌 듯, 요즘 들어 다시 식사하셨는지를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사회가 됐다.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식구(食口)’. 우리말에서 ‘가족’ 혹은 ‘가정’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이 단어는 한 집에 살며 얼굴을 맞대고 밥을 같이 먹는 사이를 뜻한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끼니를 함께 하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해왔다. 혼자 밥을 먹는 이들은 ‘조직 부적응자’나 ‘불쌍한 사람’ 쯤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들어 ‘핫’하고 ‘힙’한 ‘혼밥(혼자 밥 먹는) 족(族)’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혼밥•혼술, 즉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은 단체생활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조용한 반발일 수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매일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 정신과 진료실을 찾은 많은 환자들은 대인관계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뚫고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면서, “일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고 한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대인관계로부터의 고통에 대한 최선의 비책이 타인으로부터 냉담해지는 자발적 격리이며,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프로이트 말대로라면 최근의 혼밥•혼술은 관계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고안한 작은 쉼터 같은 것이 아닐까.
비가 계속 내리면 홍수가 나고, 햇빛만 쨍쨍 비치는 땅은 사막이 된다. 비와 햇빛이 조화를 이룰 때 생명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애착과, 나 스스로와 대면할 수 있는 고독을 균형 있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통해 타인을 바라본다. 혼자라는 사실에 대한 유아기적 불안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 해결되지 않은 마음속 불안이 ‘혼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그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우리 사회가, 이제 ‘혼밥•혼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한다.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혼밥 문화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비(非)자발적 혼밥족’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편의점 도시락 매출이 사상최대 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누군가 외로움을 감내하며 어쩔 수 없이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을 때’의 고독은 외로움이 되고 우울이 된다. 일본의 한 연구에 따르면 혼자 식사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우울증 점수가 높았고 끼니마다 반찬의 종류가 적었으며 몸무게가 가벼웠다고 한다. 압도적으로 높은 우리 사회의 자살율과 고독사 문제를 보면, 만성적이고 비자발적 혼밥은 단순히 ‘밥을 혼자 먹는 것’을 넘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니 “숨통이 트인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것조차 누리지 못했던 이들도 있다. 매년 찾아오는 겨울이지만 올 겨울은 유난히 마음이 춥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살피고 “식사하셨어요?”라고 묻는 따뜻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이효철 임상강사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