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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6-7 이슈리포트] 복면가왕과 공정한 경쟁, 정말 복면이 가장 공평하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할 수 있을까?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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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가왕과 공정한 경쟁, 정말 복면이 가장 공평하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할 수 있을까?

 

삼성서울병원 블로그 게재 : <복면가왕과 공정한 경쟁, 정말 복면이 가장 공평하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할 수 있을 까?> 2016/8/27  http://ohhappysmc.com/220744616385

인터넷이든 동료와의 대화든 한번은 들어봤을 만큼, 복면을 쓴 연예인들이 노래 실력을 겨루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여전히 화제다. 출연자들의 가창력도 대단하지만, 복면 뒤 출연자의 정체를 맞추는 재미가 인기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왜 ‘복면’일까? 보통 복면이나 가면은 실체를 감추는 거짓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복면은 선입관을 제거하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도구다. 가수가 아닌 사람도, 신인 가수도, 국민가수도 모두 복면을 쓰고 경쟁한다. 현실에서는 강자가 스펙과 배경을 내려놓고 겨루는 일은 극히 드물다. 로스쿨 입학 자기소개서에 쓰인 법관 아버지 이야기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내가 실력이 있어도 억울하게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계단에서 내려와’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모습, 대가들이 권위를 벗어던지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모습은 이렇다 할 배경이 없는 대다수 사람이 꿈꾸던 공정한 경쟁을 보여준다.

심리학은 인간 대부분이 성별이나, 인종, 학벌, 외모 등에 선입관을 가진다고 본다. 일단 자리 잡은 선입관은 경험을 통해 점점 강해진다. ‘여자는 책임감이 약하다’는 선입관을 가진 상사가 책임감 없는 남자 부하를 만나면 개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책임감 없는 여자 부하를 만나면 ‘역시 여자는 책임감이 없어’라고 선입관을 강화한다. 편견에 한번 사로잡힌 우리의 뇌를 세탁하기는 정말 어렵다. 결국 공정해지려면 복면을 쓰듯 모든 배경을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공정한 판관이 되고자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가린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말이다.

정말 복면이 가장 공평하고 가장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장할 수 있을까? 선입관과 편견을 모두 없애는 것이 옳은 것일까? 논리학자 퍼스는 “생각을 하려면 우리가 가진 선입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계몽기 이전 독일 법률 용어에서 ‘편견(vorurteil)’은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예비적인 판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선입관이나 편견 없는 선택을 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더 들기 마련이다. 시장의 모든 브랜드를 가릴 수 없다보니, 편견에 근거해서 물건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편견을 막으려다가 본질까지 가리기도 한다. 외국에서는 저자를 알리고 논문을 심사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국내 학계는 저자를 가린 채 논문을 심사한다. 무기명으로 현재 실적만을 평가하는 것이 공정할까, 아니면 과거 경력과 현재 실적을 같이 평가하는 게 공정할까?

우리 사회는 배경과 스펙을 얼마나 가려야 할지 고민 중이다. 복면을 벗고도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승리하고 누군가 패배하는, 경쟁과 질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는 성공과 승리만을 강조하고 패자에게 이길 때까지 다시 도전하라고 채근한다. 모두가 극심한 경쟁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출연자끼리 경쟁해 탈락하고 합격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돌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은 자기를 뽑아달라고 외치고, 전설의 반열에 오른 가수가 불안한 승부의 무대에 오른다. 예술 영역에서조차 경쟁을 통해 승부와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다.

경쟁과 승부는 대한민국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 같다. 청년들은 대학이, 회사가 나를 ‘픽 미 업(Pick me up)’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경쟁한다. 직장을 잡고 실력과 경험이 쌓여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고수와의 진검 승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신세계에서 경쟁과 승부는 이미 당연하게 자리 잡아, 치열한 경쟁이 없는 상황이 오히려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사람들은 이제 치열한 경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공정하게 실력을 평가하기를 바랄 뿐이다.

외래 진료에서 패배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좌절한 청춘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고,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지 못한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을 망가진 패자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이기지 못했더라도 복면을 벗고 당당히 웃을 수 있을 것이다. 1라운드에서 패해 복면을 벗은 출연자에게 많은 시청자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김석주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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