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6-2 이슈리포트] 계모의 학대와 새엄마의 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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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6-05-10 |
내용
아동학대와 계모
2015년 말 장기 결석 아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대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저항할 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고, 의지할 이도 없는 아이들이 밥을 굶고, 매를 맞고 결국은 죽어가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너무나 아프게 한다. 그런데 이 중 일부가 계부모에 의한 학대였다. 이 슬픈 사건들의 기사에는 ‘계모 학대’라는 제목이 붙었고, 사람들은 학대의 원인으로 계모를 떠올렸다. 이제 ‘계모’의 연관 검색어가 ‘아동 학대’가 될 지경이다. 계모가 전처의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생각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은 아니다. 전래 동화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심청전의 계모는 모두 악독했다. 혈연을 강조하는 동양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서양에서도 신데렐라,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역시 사악한 계모의 모습을 그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모는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믿음이 퍼져 있다.
정말 계모가 더 학대를 많이 할까?
실제로 계모가 아동 학대를 더 많이 한다면 큰일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 결혼의 21.6%가 재혼이고, 이중 절반 가량은 미성년 자녀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는 서양처럼 계부모와 사는 아이들이 친부모와 사는 아이들만큼 늘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계모가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믿음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동학대 가해자의 80% 이상은 친부모이고 계부모는 2% 정도에 불과하다. 영국의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계부모와 사느냐, 친부모와 사느냐는 7세 어린이들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역사를 보면 전처의 아이들을 훌륭히 길러낸 계모도 무수히 많다. 어린 링컨 대통령에게 독서의 습관을 길러준 따뜻한 어머니 사라 링컨도 계모였다.
왜 우리는 계모가 학대를 한다고 착각할까?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계모는 학대를 할 것 같은 착각을 할까? 어릴 때 학대를 하는 계모에 대한 전래 동화를 많이 읽어서일까? 아빠에게 새엄마가 생기는 것이 싫은 엄마들이 계모는 나쁜 사람이라고 우리를 세뇌한 것일까? 그런 학설들도 있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무의식 속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괴물 같은 동화 속 계모 이미지를 만든 것으로 본다. 어머니와 자식은 서로를 가장 사랑한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사소한 원망이나 불만을 가져본 경험은 누구나 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도 누구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조금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기를 원한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는 나를 미워하고 내가 미워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게 된다. 결국 좋은 엄마의 이미지와 나쁜 엄마의 이미지는 나뉘어지게 된다. 친어머니에게서 나쁜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괴롭다. 결국 나쁜 엄마의 모습은 모두 무의식 중에 사악한 계모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사실 이런 무의식적인 기전은 우리 마음 속의 두려운 환상일 뿐 실제와는 관계가 없다.
새엄마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
부모를 잃은 아가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너무 애처로워 돌보아 주고 싶다고들 한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식이 아니더라도 어린 아기들을 돌보려는 본능이 숨어 있다. 인간의 뇌에는 상대방의 고통을 본인도 같이 느끼게 하는 거울 뉴런도 있어, 부모를 잃은 아이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새엄마들도 다를 리 없다. 그런데 새엄마가 부모 역할을 하려면 마음이 복잡하다. 아이에게 야단을 치면 계모가 학대한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고, 놀게 했다가 아이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자식을 방치한 계모라고 욕할 것 같다. 아이들 마음도 복잡하다. 어린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떠난 건 나 때문이야’,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착각하고 괴로워한다. 친부모가 돌아와서 재결합하고 나를 다시 사랑해주는 환상을 가지기도 한다. 이 때 새엄마는 진짜 엄마와 내 사이를 방해하는 낯선 사람일 뿐이다. 결국 새엄마는 내가 동화 속 계모가 되어가는 착각 속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새엄마는 어떻게 아이들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엄마도 아이들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더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인정해야 한다. 새엄마는 친부모와 다르다. 같다고 주장한다면 현실 부정이다. 내 사랑의 크기가 친부모보다 작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 부모 잃은 아이에 대한 측은지심만으로도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작은 사랑으로 출발하자. 둘째 기다려야 한다. 친한 친구를 사귀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새엄마와 아이도 마찬가지다. 보자마자 새엄마를 사랑할 아이는 드물다. 새엄마가 갑자기 잘 해줘도 바로 진심으로 느끼기 어렵다. 너무 야속해 하지 말자. 새엄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은 수년이 지나 철이 들고 나서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행복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새엄마 자신의 마음에 상처가 깊지 않아야 한다. 아동을 학대하는 계부모는 가정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난 이 집에서 도대체 뭔가’하는 생각이 끊임 없이 든다면 어떻게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새엄마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너무 우울하다면 전문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결론: 어떻게 새엄마의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분노한 사람들은 아동을 학대한 부모에게 엄벌을 내리자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학대 받는 아이들을 구해내는 것이 처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학대 받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일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는 부모를 만드는 것이다. 계부모를 아동 학대의 주범으로 모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엄마에게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지 말고,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기다려 주자. 새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결국 아이를 웃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김석주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